AI 웨이브는 왔는데, 루키가 없다.
웨이브마다 새로운 승자가 나왔다
IT 산업의 역사는 웨이브의 역사였다.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이 등장할 때마다 무명의 플레이어가 그 파도에 올라타 빅테크로 성장했다. 웹의 시대에는 스탠퍼드 기숙사의 검색엔진이 구글이 되었고, 온라인 서점이 아마존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삼성SDS의 사내벤처가 네이버로 독립해 포탈의 왕좌를 차지했다. 모바일 시대에는 사진 필터 앱으로 시작한 인스타그램이 직원 13명일 때 10억 달러에 팔렸고, 무료 문자 앱이었던 카카오톡이 은행과 모빌리티를 거느린 거대 그룹이 되었다. 소셜의 시대는 하버드 기숙사에서 시작한 페이스북의 것이었다.
공식은 단순했다. 웨이브가 오면 판이 리셋되고, 리셋된 판에서는 아이디어와 속도가 승부를 갈랐다. 기존 강자의 자산은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오히려 짐이 되었고, 몸이 가벼운 도전자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스타트업 신화’라고 부르는 서사의 뼈대이다.
그런데 지금, 판이 굳어 있다
이 공식이 다시 작동하려면 판이 흔들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 앱 생태계의 데이터는 정반대를 가리킨다. 시장의 외형은 성장 중이지만, 그 안의 질서는 놀라울 만큼 고정되어 있다.
Sensor Tower의 State of Mobile 2026에 따르면 2025년 글로벌 인앱 결제 매출은 전년 대비 10.6% 늘어난 1,67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다운로드는 0.8% 증가에 그쳤고 1인당 이용 시간도 하루 3.6시간에서 정체되었다. 새로운 땅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그 땅 위의 주인도 바뀌지 않고 있다.

주목할 것은 마지막 줄이다. 팬데믹 이후 2024년까지 글로벌 앱 톱10은 같은 몇 개의 앱이 변화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매달 수만 개의 앱이 쏟아졌지만 왕좌의 구성은 5년 가까이 바뀌지 않은 것이다. 웹과 모바일 초기에 순위표가 분기마다 뒤집히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의 앱 생태계는 오랫동안 고착화되어 있다. 관련 기사가 없어서 그렇지 2025년, 2026년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이 고착은 성장하는 세부 시장 안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모바일 수익화의 중심으로 떠오른 구독 앱 시장이 대표적이다. Adapty에 따르면 전체 구독 매출의 95%가 상위 10% 앱에 흘러가고(2023년 92.7%에서 확대), RevenueCat 데이터에서는 2020년 이전 출시 앱이 매출의 69%를 차지하며, 상위 10% 앱이 연 306% 이상 성장하는 동안 중간값 앱은 5.3% 성장에 그쳤다. 과거 ‘건강한 앱 비즈니스’의 안전지대였던 완만한 중간 성장, 즉 허리가 사라지고 있다. 시장 전체가 굳어 있고, 성장하는 구역에서조차 과실은 먼저 자리 잡은 쪽으로 고이고 있다.

AI 웨이브는 왔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이 동결 상태를 처음 깬 것이 AI다. 5년 가까이 유지되던 글로벌 톱10에 2025년 ChatGPT와 Gemini가 진입하며 처음으로 큰 변동이 생겼고, ChatGPT는 TikTok과 Google One에 이어 세 번째로 매출이 높은 앱에 올랐다. 파도의 높이는 역대급이다. 2025년 AI 어시스턴트 앱의 다운로드는 전년 대비 278% 성장했다.
공급 측면의 충격은 더 극적이다. AI 코딩 도구가 개발의 공급 제약을 제거하면서, 월간 신규 구독 앱 출시 수는 2022년 1월 약 2,000개에서 2026년 1월 14,700개로 7배가 되었다. 과거의 공식대로라면 지금쯤 새로운 인스타그램, 새로운 카카오톡과 같은 슈퍼 루키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신규 진입이 가장 활발한 구독 앱 시장은 도전자의 성패를 관찰하기 좋은 표본인데, 그 성적표는 냉정하다.

신규 출시 앱 중 2년 안에 월 매출 1만 달러에 도달하는 비율은 4.6%에 불과하고, 2025년 이후 출시된 이른바 ‘바이브 코딩 세대’ 앱들의 매출 비중은 전체의 3%뿐이다. 도전자의 수는 7배가 되었는데 도전자의 몫은 늘지 않았다. AI 웨이브는 판을 리셋하지 못했고, 오히려 기존 판을 더 단단하게 굳히고 있다.

그렇다면 톱10을 깨고 들어온 ChatGPT와 Gemini는 무엇인가? 하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수백억 달러 자본을 등에 업은 OpenAI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글 자신의 것이다. 이들은 분명 새로운 서비스지만, 차고에서 시작한 도전자는 아니다. 출발선에서부터 막대한 자본과 컴퓨트, 그리고 웹 전체를 긁어모은 데이터를 태운 존재들이다. 웹 시대의 구글이 아이디어로 시작해 자본을 모았다면, AI 시대의 승자는 자본을 모아야 시작할 수 있었다. 도전자가 없는 게 아니라, 도전자의 공식이 사라진 것이다.
입장권이 바뀌었다: 아이디어에서 자본·데이터·고객으로
왜 이번 웨이브에서는 공식이 작동하지 않을까? 파도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AI는 그 자체가 규모의 기술이다. 모델은 자본을 먹고 크고, 서비스는 데이터를 먹고 좋아지며, 데이터는 고객이 만들어낸다. 자본·데이터·고객을 이미 가진 쪽이 AI를 붙였을 때 가장 빨리 좋아지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고객을 데려오는 단계에서부터 작동한다. AppsFlyer의 구독 앱 마케팅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카테고리(숏폼 드라마, OTT)일수록 상위 5개 앱의 광고 지출 집중도가 높아 90%를 넘는다. 선두가 확보한 대규모 설치 볼륨이 광고 플랫폼의 입찰 알고리즘을 학습시키고, 고도화된 알고리즘이 실질 CPI를 낮추며, 낮아진 CPI가 다시 볼륨을 키우는 플라이휠이 돌기 때문이다. 머신러닝 기반 광고 생태계에서는 데이터가 많은 쪽이 같은 돈으로 더 싸게 고객을 산다. 후발 주자는 같은 예산으로 점점 더 비싼 사용자를 사게 된다.

수익화 단계도 마찬가지다. RevenueCat 데이터에서 AI 기능을 탑재한 앱은 그렇지 않은 앱보다 결제자당 매출이 41% 높았다. AI가 가치를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가치를 매출로 전환하려면 이미 결제할 고객과 그들의 행동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웨이브는 강하다. 다만 이 웨이브의 입장권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자본과 데이터와 고객이다.
균열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렇다고 판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굳은 판에도 균열은 있고, 데이터는 그 균열이 어디서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AppsFlyer 데이터에서 사진/비디오 카테고리는 상위 5개 앱의 광고 지출 점유율이 64%에서 45%로 하락한, 전체 데이터셋의 유일한 예외였다. 모든 카테고리에서 집중이 심화되는 동안 이곳만 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원인은 차별화된 AI 툴들의 진입이었다. Remini는 범용 편집기가 아니라 'AI 사진 복원'이라는 원포인트 기능으로 틱톡 입소문을 타며 Picsart를 제치고 카테고리 다운로드 1위에 올랐고, PhotoRoom은 아예 이커머스 셀러의 상품 사진이라는 버티컬만 파고들어 미국 Shopify 사용자의 7.6%가 쓰는 셀러 필수 툴이 되었다. Kling AI는 AI 영상 생성이라는 새로운 기술 축으로 기존 편집 앱과 겹치지 않는 수요를 만들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균열도 있다. RevenueCat은 비즈니스 카테고리를 “수익화와 리텐션이 가장 높으면서도 사용자들이 기존 솔루션에 불만족하는 간과된 영역”으로 지목하며, 2026년 가장 큰 기회 중 하나로 꼽았다. 범용 강자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전문 영역, 즉 시장은 작아 보이지만 지불 의사가 확실한 버티컬이 다음 균열의 후보라는 뜻이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균열을 만든 것은 더 많은 자본이 아니라 강자가 보지 못하는 각도였다.
아이디어의 시대에서 생태계의 시대로
결론은 불편하지만 명확하다. AI 시대에는 아이디어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RevenueCat조차 신규 진입자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제품’이 아니라 진정한 유통 우위 또는 기존 사업자가 놓친 카테고리라고 못 박는다. 혼자서 자본·데이터·고객을 모두 갖출 수 없다면, 그것을 가진 존재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가 전략의 본질이 된다. 웹과 모바일 시대의 질문이 “무엇을 만들 것인가”였다면, AI 시대의 질문은 “누구의 생태계에서, 누구와 함께 만들 것인가”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선택은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기업 앞에 놓인 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강력한 생태계 안으로 빠르게 결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에게는 이것이 안전한 길이다. 플랫폼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들의 자본과 데이터와 고객 위에서 사업을 키우는 방식이며, 웨이브가 굳혀 놓은 판을 인정하는 현실적인 선택이다.
두 번째는 예외가 되는 일부 영역에 빠르게 진입하는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균열은 존재한다. 다만 이 문은 정면 돌파로 열리지 않는다. 기존 강자들이 보지 못하는 미세한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자들에게만, 좁지만 길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고유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특정 전문 영역에서 버티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법이다. 빅테크의 범용 모델이 닿지 못하는 곳, 웹을 아무리 긁어도 얻을 수 없는 데이터가 쌓이는 곳에서 승부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별도의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